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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트인사이트 Dec 11. 2019

르르르 짤방전

이 전시는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걸까

 

르르르 첫 번째 프로젝트 <짤방전>이 12월 8일에 끝났다. '예술, 나만 어려워?' 라는 강렬한 물음을 던진 큐레이터는 이렇게 설명한다. 작가의 의도는 전문 비평가만이 해석할 수 있으니 대중과 예술의 거리가 멀다. 그런 불만을 해소하고자 불만 해소 크리에터 르르르가 이 전시를 기획했다고 말이다. 누구나 의도를 알 수 있는 직관적이고 빵 터지는 전시. 그게 <짤방전>이다. 




짤방


   

인터넷 커뮤니티 '디시인사이드'에서 올리던 이미지에서 비롯되었다. 게시글이 잘리지 않기 위해 올린 사진을 '짤림 방지'라고 부른 데서 유래됐다. 이것은 오늘날 하나의 콘텐츠로써 '짤' 이라는 하나의 소통 방식이 되었다. 짤은 일상으로 확장되어 개개인의 취향을 반영하며 공감을 얻기도 한다. 

 

 

가장 일상적이고 대중적인 소통 방식의 하나인 짤방을 미술관이란 제도 속으로 끌어왔다. 관람객은 이 짤방을 날것 그대로 미술관에서 마주하며 반가움을 느끼거나 당황할 수 있다. 그저 기획의도처럼 현대미술은 어렵고 난해하다는 편견에서 벗어나 예술이 직관적일 수 있다는 걸 느끼면 된다고 한다.




트렌디한 미술관


 

 

이번 전시는 시작부터 주목을 받았다. 짤방을 가지고 전시를 한다고? 나 또한 의아한 사람 중 하나였다. 궁금증을 해소하러 방문한 미술관은 입장부터 당황스러웠다. 인스타그램 계정 '르르르'를 팔로우 해야 무료입장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오디오 가이드도 특이하다. 오디오 가이드는 작품을 이해하는 것을 돕기 위한 보조 장치로, 이것을 위한 홈페이지나 기기가 따로 있다. 그러나 <짤방전>의 오디오 가이드는 유튜브 영상이다. 전시장 입구에 세워진 큐알코드를 찍으면 링크가 연결되는 형식이다. 유튜브라는 매체를 적극적으로 이용한 것이 '짤방'이란 소재에 적절한 장치였다. 게다가 단순한 작품 해설로 그치지 않고 재치 넘치는 멘트와 상황극이 듣고 있으면 그 자체로 재밌었다.

 

 

또 하나 특이한 점은 직사각형 모양인 여타 전시 입장권과는 달리 <짤방전>의 입장권은 팔찌다. 초록색의 기다란 종이는 마치 페스티벌의 티켓 같다. 전시를 감상하기도 전에 이 전시가 원하는 느낌을 알 수 있지 않은가.

 



 

인터넷에서 유명한 짤들을 그림으로 그리거나 도자기로 빚어낸 작품들. 명작을 과감히 패러디하거나 욕설을 그대로 조각하기도 했다. 저속한 언어로 좋다고 말하는 짤과 메신저에서나 쓸법한 짤이 전시장에 걸려 있으니 얼마나 재밌겠나. 사람들의 표정이 대체로 밝았다.

 


르르르 측은 이것에 '짤아트'라는 이름을 붙였다. 제목만 봐도 기존의 미술작품과는 거리가 멀다.

 



  

그 외에도 '짤카이브'라는 이름의 짤방 연대기와 고전 짤들이 짤방의 기원과 현대사를 보여준다. 또한 관람객들이 사진 찍을 수 있는 포토존과 유튜브 <문명 특급>과의 협동 작업 등이 있다.

 

전시의 가장 마지막 공간은 '짤줍방'이다. 관람객이 참여할 수 있는 공간으로써 말풍선을 직접 채워 자신만의 짤을 만드는 것이다. 다 만들고 제출하면 이 짤에 맞는 작은 스티커도 준다.




그래서?


 

기존에 없던 시도에 미소 지으며 관람했다. 아는 짤방이 나오면 반가워하기도 하고 몰랐던 짤방은 기발하다며 웃었다. 그런데 문제는 미술관을 나오고 나서였다. 이 전시가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각자 전시를 보는 기준이 다르겠지만, 나는 보통 전시가 말하는 '의미'에 초점을 둔다. 전시를 본 뒤 느끼는 감정과 거기서 파생된 의문을 중시하기에 전시를 보는 동안 느낀 '재미'는 '평가'와 비례하지 않는다. 즉, 전시를 다 보고 전체적인 평을 내린다. 그런데 <짤방전>은 도무지 와닿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 곰곰히 생각했다. 이 전시가 말하고 싶었던 게 뭘까. 짤방의 유래? 역사? 미래? 그 어떤 것도 아니었다. 결국 미술관을 나서며 공허함을 달래야 했다. 작은 알사탕을 위해 포장된 대형박스를 연 느낌으로.

 

짤방이라는 소재는 신선하다. 일상에 누구나 접할 수 있는 소통 방식이자 시각적으로 가장 효과적인 언어이다. 그렇다면 소재를 풀어내는 방식이 과연 매력적이었나? 아니었다. 자유롭고 현대적인 소재를 미술관의 법칙에 맞춰 그대로 걸은 것은 과거를 답습할 뿐이지 전혀 색다르지 않다. 원본을 재해석하기는커녕 그대로 재현한 것은 창작이라 불리기 어렵다.

 

반대로 그 점을 뒤집어서 생각해봤다. 우스운 짤방을 다시 그려내 벽에 걸거나 아크릴 상자에 담아 선반에 놓음으로써 미술관이 가진 고리타분하고 제도적인 면을 조롱하려 한것은 아닐까. 하지만 그렇게 해석하기에는 이 전시의 기획의도와 너무 멀어진다. 어떻게든 실망하고 싶지 않은 나의 해몽일 것이다. 묻고 싶다. 짤방 그대로 보여줄 수 있는 것을 다시 그린 데에는 어떤 의미가 있나요? 차라리 짤방을 거대하게 프린트해서 뿌려놨다면 그게 더 신선했을지도 모르겠다.

 

'짤아트'라는 거창한 이름에 비해 작업물은 '키치 Kitsch'라고 불리기도 민망한 수준이다. 콕 찍어 한 작품만 그런게 아니다. 전반적인 작품에서 어떤 '의식'을 찾아볼 수 없었다. 작가의 생각을 담지 않은 것이 예술로서 존재 가치가 있을까. 만약 예술로 존재한다면 보는 이에게 어떤 울림을 줄 수 있나.

 

 

 

예술의 기준


 

일각에선 이 전시가 논란의 중심이었다. "예술이 장난이냐" vs "어려워야 예술이냐"로 나뉘어 대립했다. 두 입장 모두 일리가 있다. 그러나 예술의 기준은 누구도 정의하지 못한다. 몇천 년간 이어져 온 창작활동이 예술이라는 의견, 르네상스부터가 진정한 예술이라는 주장. 어떤 게 정답이라 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예술이다. 가장 모호하고 어려운 것을 '예술, 나만 어려워?'라는 명목으로 점화시켰다면 논란을 피할 수 없다.

 

또한 문제 되는 부분은 짤 선정이다. 혐오와 편견이 깃든 짤방이 무분별적으로 선정됐거나 관객의 참여 중 혐오표현이 들어간 짤방이 검열없이 전시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점이 애매하다. 대중문화를 미술관에 데려오는 순간 그 속에 깃든 문제가 공공연히 드러나기에.

 

친숙한 예술, 좋다. 그런데 속없는 알맹이를 예쁘게 포장한다고 예술이 될까. 그 기준은 누가 만드는가. 만약 <짤방전>이 이런 질문을 하는 전시였다면 역설적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하지만 기획의도를 아는 관람자로선 이도 저도 아닌 느낌만 든다. 그 결과 무언가 덜 보고 나온 것처럼 찝찝했다.

 

 

대중의 관심을 끄는 미술, 쉬운 미술은 사실 간단하다. 전시에 몇가지 장치만 두면 웬만하면 즐거워진다. 예를 들면 많은 사람이 좋아할 법한 스타와의 콜라보레이션이라든지, 저명한 스타 작가의 내한 전시라든지. 혹은 인터넷에서 유행하는 것들을 조합한 전시 등등. 하다못해 사진 찍기 좋은 소품들을 활용해 포토존 몇개만 만들어 놓으면 그 전시는 관람객들로 넘쳐난다. <짤방전>처럼 전시 막바지에 "참여해보세요!" 하고 종이와 색연필만 배치하면 사람들은 알아서 즐긴다. 관객 참여는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


그러나 그 후가 중요하다. 어린이를 위한 색칠공부 시간이 아니라 전시이다. '내가 지금까지 관람한 작품을 어떻게 내 방식으로 해석하고 승화할 것인가'가 현대미술의 핵심이고. 이 점이 전시의 인상을 좌우할 수도 있다.

 

<짤방전>의 의도는 불분명하다. '짤줍방'도 그렇다. 만약 관객참여로 또 하나의 예술이 탄생하는 걸 원했다면 좀 더 확실했어야 했다. 말풍선을 채운 종이를 제출한 관람객은 제것이 벽에 걸리는지, 아니면 구석에 처박혔다 분쇄기로 향하는지 전혀 알 수 없다. 참여 예술의 일원이 된 기분도 주지 못한 것이다.



  

세대


 

전시 내용 외 아쉬웠던 점은 <짤방전>의 주 타깃층이 10대 20대만 겨냥했다는 것이다. 특히 인스타를 팔로우해야 입장 가능한 지점은 인스타그램 계정이 없는 이들을 배려하지 않은 방식이었다. 가령 5-60대 관람객은 SNS를 하지 않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물론 다른 입장 방법이 있겠지만, 굳이 전시장 입장을 인스타그램 팔로우로 내세워 진입장벽을 높일 필요는 없었다.

 

앞서 말한 오디오 가이드는 신선했으나 불편했다. 유튜브 특성상 원하는 부분을 들으려면 댓글에서 좌표를 찾거나 직접 상태바를 당겨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다. 그 부분에 대한 고려를 좀 더 했다면 좋았을 것이다. 철저한 준비가 돋보인 재미진 해설이었지만 전시장 내 사람들은 하나 둘 이어폰을 벗기 시작했다. 작품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기 보다는 오디오 자체로 너무 튀는 탓이다.

 

인터넷을 주로 하는 세대를 겨냥한 장치들은 결과적으로 미술 앞에서 세대를 분리시켰다.

 

 

 

자극만을 위한 전시


   

'예술, 나만 어려워?' 예술은 당연히 어렵다. 평생을 예술만한 사람들도 아직까지 예술을 무어라 정의하기 어렵다고 한다. 많은 이에게 추앙받는 예술가들도 예술이 쉽다고 하지 못할 것이다. 특히 현대미술은 더욱 어렵다. 시각적으로 작가의 의도를 전달하다 못해 사회를 반영해야 하고, 문제의식을 녹이고, 관람자의 해석까지 도와야 한다. 일기장에 늘어놓을 법한 이야기가 아니라 세상에 전하고자 하는 '의미'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과학이 어렵다는 데에는 누구나 동의한다. 법이 어려운 것도 배우지 않았으면 당연히 어렵다. 그런데 왜 예술은 쉬워야 하나? <짤방전>의 캐치프레이즈는 예술이 마치 쉬우면 안될 것만 같다. 많은 이가 '나도 하겠다'며 비하하지만 현대미술도 오랜 역사를 지닌 학문이다. 들여다보지 않으면 어려운 게 자연스럽다. 만약 이 문구를 내세워 일민미술관이 제시하고 싶었던 것이 잘 구현됐다면 성공이다. 그러나 구태여 이 문구를 통해 예술의 다양성을 깎아내려야 했을까. 예술이란 학문을 고찰하고 고뇌하는 변방 예술가들의 노력을 폄하하는 문구라고도 생각한다.

 

쉬운 전시? 좋다. 쉬운 예술? 좋다. 예술이 어려워야만 하는 건 아니니까. 하지만 한 번의 유희로 끝나는 게 예술인가? 내가 생각하는 예술은 그런 쾌락이 아니다. 어떤 이에게는 그 공간에서 웃고 즐거웠다면 예술이겠지만, 보는 게 끝이 아니라 '생각'해야 한다. 예술은 그것을 돕는다.

 

달고 짠 디저트를 먹으면 쌀밥이 싱거운 것처럼 자극적인 볼거리도 그렇다. 다른 전시가 고리타분하고 무겁게 느껴진다. 그러나 반대로 디저트만 먹다보면 어느 순간 쌀밥이 당긴다. 그런 자극은 일회성이라는 것이다. 지속되지 않고 더 큰 자극을 원하게 할 뿐이다. 문자 그대로 <짤방전>은 '일회성'이었다. 전시장에 들어서기도 전에 예상했던 딱 그대로. 더도 않았고 덜도 않았다. 어쩌면 이 논란 자체가 현대미술이라는 생각도 든다. 지금의 미술이 맞닥뜨린 갈등과 논점을 생각할 여지를 준다.


다만 이번 전시는 그동안 일민 미술관이 보여준 전시와 궤를 달리하기 때문에 당혹스럽다. 젊고 유망한 현대미술 작가의 무대였던 공간이 갑자기 "예술 어렵지?"하며 걸어온 길을 벗어나다 못해 부정한 느낌이다. 놀이공원 같이 친근하고 대중적인 미술관을 원하는 것 같지만 글쎄. 겉모습만 요란하다고 사람들의 발길이 닿을까. 기획을 충족한 내용은 아니었다.


<짤방전>은 온라인에서 많은 화제를 끌어 관람객이 줄을 선 성공적인 전시였으나 개인적으로는 무척 안타까운 전시였다. 쉬운 것만 찾는 이 사회의 단면을 예술마저 닮아가려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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